2019.12.20~12.29       내가 없는 낯선 광경 황석권 《월간미술》 편집장   낯설다.   이 세음절의 단어가 만들어내는 감정은 얼마나 큰 파동을 일으키는가? 당연지사를 거부하고 고민없는 일상이 제공하는 안정감을 벗어 던지는 행위는 사실 현실에서 좀처럼 선택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낯선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업 혹은 그것의 메커니즘은 항상 생소한 미적체험과 연결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작업에 등장하는 요소가 대부분 이질적인 장소 혹은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잘 정돈된 책상이나 점포의 상품처럼 거기에 있어야 하고 세상의 질서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듯 관람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적 배경 혹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해하려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고 의문을 가지며 비상식이라는 영역의 뇌회로를 작동시켜 상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적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미경은 다른 성격의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프레임에서는 그야말로 익숙한 장면이 펼쳐진다. 그냥 집, 그냥 나무, 그냥 길, 그냥 전신주와 전선 등. 그의 프레임에 등장하는 요소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상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간략하다. 그러나 그의 프레임이 이런 낯선 광경을 연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광경을 포착하는 힘에서 기원한다. 이곳의 접근도가 그나마 떨어지는-그나마도 이젠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는-제주라는 점을 빼면 다소 이국적인 요소인 야자나무 정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이 ‘특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될 터이다. 특별할 것이 없는 요소의 집합으로 이뤄진 프레임이다 보니 관람객은 그 특별함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던 노력을 기울여야 할 판이다. 정사각형의 프레임은 즉각 발견할 수 있는 한 예가 될 것이다. 가로×세로 익숙한 포맷에 길들여진 관람객은 김미경의 프레임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는 “조화가 잘 이뤄지는 시선을 갖게 하는 2:3, 3:4 비율의 직사각형 프레임”보다 “다른 곳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정 중앙에 나무를 배치하기도 하면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배제한 작가의 의도다. 또 하나 김미경의 프레임이 낯선 이유는 세로 구도의 적극적 활용에 있다. 정중앙에 위치한 우뚝 솟은 나무는 주택가에 있는 것이 어색하거나 조화롭지 않은 요소로 비친다. 그 존재가 너무나 당연시되어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되어버린 나무. 그 나무를 과감히 프레임 중앙에 배치해 그 존재를 당당히 알리고 집이나 돌담 등의 평온함을 상징하는 요소와 극명히 대비시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일상의 조화를 전복시켜 불편함을 가중시키고 익숙함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듯하다.   지금까지 김미경의 프레임을 일견해 발견하는 프레임 자체가 주는 낯설음이었다면 그것만으로 구현될 수 없는 낯설음의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리 말하자면 그것은 배제, 덜어냄, 의도된 부재(不在)화라는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김미경이 작업의 방향을 설정하려 자주 찾았다는 제주는 사실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는 아니다. 이는 어디선가 봤을 익숙함에서 다소 벗어난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김미경은 이번 브레송 개인전 전시 타이틀인 <익숙함의 경계에서>가 암시하듯 카메라를 든 방문자는 별 다를 것 없는 삶의 현장에 침투했다. 그렇다고 벽 너머 원주민의 삶을 세세히 포착한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별한 사물 혹은 현상을 찾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촬영 당시에만 발견할 수 있는 개연성을 확실히 배제해 그의 사진은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과 거리를 두고 있다. 사진을 작업으로 대할 때면 중심 요소와 그 주변을 나누어 보게 된다. 이는 중심을 부각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기 때문인데 프레임 내부에서 크기나 움직임, 색채, 구도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김미경의 프레임 내부의 요소들은 모두 동등하다. 나무, 집, 전신주, 돌담, 길 등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시선을 두는 습관이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김미경의 프레임 속 평등한 광경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최소한의 요소가 고요 속에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김미경의 프레임은 차분하다 못해 섬뜩한 객관화로 침잠한다. 그의 프레임에서 느끼는 유일한 의도 혹은 주관은 극단으로 치닫는 객관화이다. 셔터를 누른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겠지만 이마저도 아니라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프레임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서 이뤄진 것으로 흔히 말하는 스냅 사진이 보여주는 극단의 우연은 결코 아니다. 그 평등한 프레임이 의도된 계산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광경은 그것을 촬영한 작가만의 시선이고 역량이다. 마지막으로 김미경의 작업이 이른바 ‘작가 작업으로서’ 당위를 획득하는 이유는 전시장을 방문했다면 알겠지만 맥락성을 구축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 맥락은 전시장을 방문해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프레임 내부의 요소는 분명 어떤 유형으로 분류되어 있고 일관되게 그의 작업에서 유지되고 있다. 하나의 프레임 내부의 요소가 주는 낯선 감정은 프레임이 모인 전시장에서 묘한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각각의 프레임 내부의 전혀 닿지 않은 맥락의 단절이 전시장이라는 집합공간에서 재맥락화된 결과다. 전시장에서는 김미경 사진이 주는 낯설음, 그리고 그 감정의 대척점인 동질성을 함께 느끼려면 전시장을 방문해야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필자는 지금 제주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런데 따로 시간을 내 김미경이 촬영한 장소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그곳과 그가 촬영한 그곳은 분명 다른 의미이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물리적 공간은 변하지만 김미경의 그곳은 항상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