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도-윤은숙 출판기념전

 2021.3.3.~3.12

 

 

찰나이거나 영겁으로, <부엌도(kitchen)_To heaven>

 

……

저녁놀 아래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마련한다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 합창

압력솥의 볼레로

냄비와 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

접시와 사발들의 마주르카

영대 대신 앞치마를 두른

나는 부엌의 제사장

부엌은 성스러운 나의 제단

……

박은율(1952), 「부엌칸타타」 중

 

 

투명한 유리병들, 백색의 그릇, 포크, 나이프, 선인장 모티프의 자기 소품, 우윳빛 도자기와 촛대, 흰 꽃송이 등 단정하고 정갈한 사물들이 테이블 위에 숨을 죽이고 있다. 빛의 조각을 완성하듯 강렬하고 어지러운 형과 색은 소거되고 담백한 긴장감이 휘감는다. 간소한 사물의 형상은 테이블의 각도와 무심한 듯한 구성으로 엮어내는 이들 그림 같은 사진은 윤은숙의 최근작 <부엌도_To heaven>(2020/21) 시리즈이다. 부엌에 대한 작업은 2018년 <부엌도_플라스틱 키친>으로 시작하여, 2019년 <부엌도_만다라>에 이은 세 번째 시도이다.

1992년 <수영하는 사람>으로 출발하여 이후의 <어머니>(1998), <여성, 두 개의 이름으로>(2000), <관계된 풍경Ⅰ>(2008), <관계된 풍경Ⅱ>(2010) 등의 작업이 인물과 풍경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부엌도> 시리즈는 부엌의 사물에 집중하고 있다. 인물, 풍경으로부터 사물이라는 다른 대상들로 포커스를 옮겨온 듯 하지만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존재론적 사유라는 맥락에서 일관된 재현 체계를 갖고 있다. <부엌도> 시리즈는 사물들이 식탁과 같은 테이블 위에 드러나는 정물의 형식을 취하면서 오히려 작가 내면으로부터 투사되는 정서적 시각과 체험적 표현이 보다 섬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작가는 부엌 사물들과의 내밀한 응시와 시선 교환을 통해 내면의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다.

부엌이란 요리를 하는 곳이다. 부엌, 키친(kitchen)이란 영어 단어는 코키나(kokina)로부터 파생된 키체네(cycene)를 어원으로 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사용되던 이 말은 코치나(cocina)에서 비롯하였는데, ‘요리하다(coquere)’라는 동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부엌이란 말 그대로 요리와 관계된 공간이다. 온갖 육류와 해산물, 과일, 야채, 접시, 물병, 잔, 나이프, 포크, 가위 등 부엌의 사물들은 요리를 하는 주체의 절차와 관행에 따라 다루어진다. 모든 날것과 인공의 대상이 매우 직접적이면서도 철저히 문화적인 실험과 사회적 관례가 혼성되는 공간이 바로 부엌이다. 즉 부엌은 은밀한 주관과 관습적 행태를 접하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한 시대와 사회의 질서가 녹아있는 특별한 장소인 것이다. 부엌 내 사물의 체계는 특정 사회의 개인과 사회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제도까지도 드러내며 작가는 이들 체계의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같은 주체의 실험과 정서가 사물들의 회화적 구성의 정물로 구현된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부엌도(kitchen圖)’라고 명명한 작가의 발언은 곧 그의 정물이 부엌의 길(道)일 수도, 부엌의 칼(刀)일 수도, 부엌의 그림(圖)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사진 자체라고 할만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술로서 사진의 지위는 그것에 부여된 권력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하나의 실천으로서 사진의 특성은 이를 규정짓고 작동하게 만드는 제도와 행위자에 달려 있다. 문화생산양식(mode of cultural production)으로서 사진의 기능은 특정한 존재 조건과 연관되고 그 생산물은 특정한 유통 내에서 의미를 가지며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사진의 역사는 단일하지 않다. 그것은 제도적 공간의 장(field)에서 명멸한다.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장이다.”(John Tagg, “Evidence, Truth and Order:Photographic Records and the Growth of the State”, The Burden of Representation: Essay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London:McMillan Education, 1988, p.63)

존 택의 발언처럼, 윤은숙의 사진은 하나의 문화생산양식이자 제도적 공간의 장 내에서 여성 주체의 진동하는 시선의 하나이다. 2018년의 <부엌도_플라스틱 키친>은 날이 선 칼과 플라스틱 과일이 있는 식탁의 정물로 스릴러 영화의 전조 장면처럼 긴장이 감돈다. 그림처럼 보이는 픽토리알리즘(Pictorialism)의 전형으로 다가오는 사물들의 의도적 구성과 직선의 테이블 각도는 가족의 정서적 교감보다는 억압된 관계와 반복적 행위의 거세가 스크리닝된다. 무엇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언캐니(uncanny, unheimlich)’, 익숙한 두려움을 말한 장면이 바로 작가의 평면 속에 있다. “생선, 야채, 고기, 과일 등의 무한한 식재료들과 칼, 도마, 냄비, 국자 등의 다양한 조리 도구들이 공존하는 공간”인 부엌은 오랜 시간 작가에게 “모성애 가득한 공간”으로 존재했지만, <부엌도_플라스틱 키친> 시리즈에서 “차가우면서도 신경증적인 강박이 있는 낯선 공간”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진 속 사물은 실재(real)와 가짜(fake)가 공존하는 익숙한 공간의 심리적인 낯섦을 주도하는데, “도마 위의 생선, 쪽파, 감자, 피망”, 때때로 이 공간 밖의 사물까지도 개입시켜 이질감을 섞는다. 초현실주의 오브제의 강박적 아름다움의 실재를 상기시키는데, 이는 사진의 재현체계에 회화적 구성이 결합된 방식으로 사진 같은 그림이자, 그림 같은 사진의 양가성 때문이기도 하다. 편안함과 불편함, 정돈됨과 흐트러짐 등의 상반된 태도가 혼성적으로 존재하는 이들 작업은 작가의 말대로 “낯섦과 서늘함”을 전이한다.

<부엌도_플라스틱 키친> 시리즈(2018)의 강렬하고 예리함의 정돈된 불편함으로부터 <부엌도_To heaven> 시리즈(2020/21)는 이질적인 것들, 날이 선 것들이 사라지고 익숙한 것들의 낯섦이 아닌 투명한 편안함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일상의 반복적 노동과 심리적 억압을 덜어내고 비우는 수행적 행위를 제한된 색채와 간결한 사물로 재현한 것이다. 앞서 <부엌도_플라스틱 키친> 시리즈가 잔 그루버(Jan Groover)의 회화적 구성의 면들과 색채와 같은 강렬한 정물로 시선을 압도했다면, <부엌도_To Heaven> 시리즈는 백색 주조의 모노톤과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선들의 사라짐으로 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창백함에 도달한다. 좌절된 욕망도, 짓누르는 관계망도 보이지 않는, 비어있는, 무의 공간으로 환원된 것이다. 정물 이전의 작업들과 다르게 <부엌도> 시리즈는 사물과의 조응을 통한 내적 관조에 이르게 하는데, 이 근작들은 심리적 여정이 한층 깊어진 것이다.

부엌의 기물들과 식자재들이 어떻게 놓이든, 어떤 색을 갖든 작가의 세계 속의 사건이다. 익숙한 사물의 체계를 와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도 심리적, 사회적 관계망과 코드들은 투과되기 마련이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총체적 감각이 동원되는 삶의 풍성한 서사와 정서의 공간인 부엌은 조왕신의 영역이자, 불과 물의 협업적 공간이며 일련의 기물들과 기술들이 만나며, 살아있는 생물과 인공의 사물이 만나는 플랫폼이다. 그럼에도 모든 감각과 사물 그리고 사건은 작가의 사물의 체계 속에서 찰나(刹那)이거나 영겁으로 선택되고 존재한다.

 

박남희(미술비평)

 

윤은숙_부엌도#12_60cmx48cm_Archival Pigment Print_2020

윤은숙_부엌도#14_60cmx48cm_Archival Pigment Print_2020

윤은숙_부엌도#16_60cmx48cm_Archival Pigment Print_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