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을 찾아서 1: 고정남論

고정남 論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 정해진 것은 없다.

 

 이광수(사진비평가/부산외국어대 교수)

 

고정남 사진 세계는 손에서 떨어져 나온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 같다. 어디로 갈지 좀체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바람 빠져가는 풍선도 일정한 궤적은 있다. 그 궤적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정남은 90년대 초 학생 운동이 정점을 찍으면서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져 갈 준비를 하던 시절 전남대에서 미술을 했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자리에서 꽃을 피우던 그 희한한 시절에 그의 미술은 기존 질서 거부와 뜨거운 조국이 섞이면서 그 씨가 잉태하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사진 세계는 바로 이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 세계관이 섞이면서 나온 것이다. 고정남이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 98년 일본 유학에서부터이니 얼추 20년이 다 되어간다. 50이 넘은 나이지만 사진 나이로는 청년 중의 청년이다. 그의 주제, 소재, 방식이 어떤 틀로 짜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피 끓는 청춘이다.

일본에 유학 가서 처음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그 집은 고향 장흥에서 보았던, 그렇지만 전혀 눈 여겨 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냥 그저 그런 옛 추억의 적산가옥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느닷없이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어린 시절 부리나케 들락거렸던 친구네 집 2층집 관흥여관이 떠오른다. 일제 시대 때 부산과 여수를 잇는 물길의 요충지였던 탓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 동네 이곳저곳에 있었다. 그것이 갖는 역사성의 의미는 모르겠고, 그저 어릴 적 추억을 머금은 중요한 오브제가 고향을 떠나온 그 자리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고정남 사진의 궤적인 ‘장소와 관계성’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유정(有情)이라고 했던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빈 공간에 미움, 괴로움, 사람, 욕심, 집착과 같은 업(業)의 힘들이 마구 섞이면서 어떤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것 말이다. 떠나옴, 그리움, 그저 그러함, 불안감, 새로움이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은 일본 땅에서 물 흐르듯 섞이면서 그의 사진 세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집.동경이야기#06_Gelatin Silver Print_42x51.5Cm_2001/집.동경이야기#04_Gelatin Silver Print_42x51.5Cm_2001

 

일본에서 한 초기 작업인 ‘집. 동경 이야기’(2002)는 고정남이 지금까지 유지해오는 자신만의 작품 구성의 요체를 다 머금고 있다. 그 때 만들어진 고정남 사진 세계의 뼈대 위에 살이 붙어 오늘에 이른다. 그의 사진을 이루는 형상은 솥과 같다. 무슨 재료를 넣든지 다 끓여 뭔가 다른 음식을 낼 수 있는 솥 말이다. 그런데 그 솥의 발이 셋이 아니고 넷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첫 번 째 솥의 발은 평범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시선이다. 대도시 동경을 스치듯 지나면서 취한 장면들은 하나같이 전혀 뛰어나지 않는 그저 그런 보통의 이미지다. 관조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가 주체적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는 듯 한 시선이다. 분명히, 주관적인 시선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들로 쌓여 있는 백화점을 아이쇼핑 하듯 지나갈 뿐인데, 순간, 순간 어떤 촉이 발동하여 필을 받는다. 두 번 째 솥발은 장소성이다. 그 장소성은 ‘집’과 ‘콘크리트’로 표상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식물성으로 확장되고 그것은 다시 자연성과 여성성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 그의 장소성은 항상 누군가 그 의미를 매개해주는 사람과 연결된다. 장소가 관계성으로 이어지고 기억과 만나면서 사진가는 표현 방식에서 새롭고 의미 있는 발걸음을 하나 대딛는다. 세 번째의 솥발은 기억의 변주다. 집이나 거리와 같은 평범한 대상, 그리고 그 안에 놓이는 사람, 오브제, 식물성 등은 모두 기억을 매개로 하여 연결된다. 그런데 그 연계가 일정한 내러티브를 만들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저 평범한 하나, 하나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처럼 불륜이나 위선 등과 같은 일정한 주제 의식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그 평범한 것들을 자신만의 기억의 흐름에 따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쉬 따라가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기억이라는 것이 불안하고, 정형화 되지 못하며, 그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솥의 발은 대동 세상이다. 평범한 대상을 통해 장소 속으로 들어가 기억의 나래를 펴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대동 세상이다. 세상은 둘로 나뉘되 그 둘은 결국 둘이 아니고 하나다. 안과 밖, 자연과 인공,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모두가 다 하나로 모인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다. 고정남은 그 정리할 수 없는 불순한 세계를 사진으로 말하려 한다. 발이 넷 달린 솥은 불안하다. 지금 중간 단계에 와서 본 고정남의 사진 세계에 또 하나의 발이 나오려 꿈틀거린다. 무슨 발이 나올지, 앞으로 발은 몇 개나 더 나올지 궁금하다. 그의 물과 같이 흐르는 그 어떤 것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 없고, 낳지 못할 것이 없는 사진 세계의 무궁무진함이 가히 불교가 말하는 유정의 세계와 같다.

                                         Super Normal#05_Lambda print_60×60Cm_2009/Super Normal#10_Lambda print_60×60Cm_2004

 

  1. 평범한 것들의 세계

 

고정남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성이다. 대상도 평범하고 그것을 재현한 이미지도 그저 그런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할 때 그래픽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그 분야에서 몇 년간 일을 한 데서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을 전공하면서 모더니티가 갖는 가치 평가를 둘러싸고 형성된 객관성에 대해 반발하였고, 자기 자신이 보는 세상, 자기 자신이 그리는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이 갖는 세상과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강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릇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로 분명하고 진리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은, 무릇 모든 존재란 그것이 속한 배경에 따라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그것에 대해 매기는 가치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자리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 눈앞에 펼쳐진 대상이 그 어느 때든 관계없이, 그 누구든 관계없이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들이 잘 알고, 그것이 갖는 어떤 분명한 의미를 국외자인 사진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여 그 의미와 달리 이해하고 느꼈다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동네 골목에서 만난 스모 선수는 일본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으나, 국외자인 사진가에게는 호기심이나 경외감 같은 것을 주는 존재이다.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임시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갖는 가치란 대체 무엇인가?

고정남 사진의 평범성은 그가 하는 기억 작업에 매우 유효한 매체로 작동한다. 사진은 그 이미지가 강력할수록 그 사진 기록이 갖는 사건의 장소, 대상의 정체성, 시간 등에 구체성은 약화되고 상징성만 강력해진다. 상징성이 확대됨으로써 그 이미지는 사건의 표피를 남기고, 그 이면에 담긴 복합적 관계는 무시되기 쉽상이다. 결국 사진으로 하는 기억은 그 이미지의 보편성으로 인해 복합 관계를 단순화하여 그 근원적 인과 관계를 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건에 대한 시각적 증거가 되면서 역사를 신화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약간의 심한 일반화이겠지만, 그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은 집합 기억의 표상으로 구성된 기념물, 전시물 등과 다를 바 없게 될 수 있다. 결국 비범한 대상과 사진 이미지는 사건을 신화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나’ 자신만의 이질적이고 액체적인 기억의 관계를 맺기 어렵게 된다. 그렇지만 평범성을 보여주는 소재는 일목요연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서 대상들과 관계 맺기가 무궁무진하다.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 만들기이다.

세계를 평범한 것들이 모인 것이라 본다면 그의 사진 또한 평범한 것을 대상으로 삼고 평범하게 재현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극적이고, 강하게 어필하고, 빛을 이용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 세계는 그런 강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체계적인 것도 아니요, 논리적인 것도 아닌데, 왜들 다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려 안달인가? 당신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 고정남 사진 세계를 이해하러 가는 출발선에 서는 거다.

                                               Song of Arirang#01_Lambda print_101.6×76.2Cm_2010 / Song of Arirang#06_Lambda print_101.6×76.2Cm_2010

 

  1. 기억의 변주와 관계 맺기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매체다. 오랫동안 기억은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 문자에 의한 기록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원인과 과정을 단순화 시키거나 없애버릴 수밖에 없다. 얀 아스만(J. Assmann)은 기억이 문화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기억은 문자, 회화, 영상, 건축물, 제의, 기념비, 박물관 등을 통해서 유지된다고 했다. 기억은 철저하게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이 기억을 위한 매체로 쓰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사진가들이 기억을 주제로 작업을 많이 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 그 자체가 항상 지나간 시간을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항상 무엇이든지 간에 대상을 놓고 찍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상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기억은 ‘공간적 기술’이 된다. 우리는 기억을 떠올릴 때 일정한 구조를 갖는 ‘장소들’을 기준으로 떠올린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학교 갈 때 자전거를 태워준 그 길, 친구들과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갈 때 탔던 그 엄청난 크기의 배, 첫사랑 그녀와 등산을 하다 길을 잃고 산중 노숙을 하던 그 산비탈 … 우리는 기억을 할 내용들을 이미지로 바꾼 다음, 그 장소에 기억할 내용을 차례대로 쌓는다. 고정남에게 기억의 출발은 이 땅에서는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 불리는 일본식 집에서부터였다. 적산가옥은 그가 어렸을 적에 전라도 장흥에서 살 때 많이 보던, 그렇지만 무심코 지나쳐버린 집이다. 그것을 일본 유학 가서 만났다. 그러자 그 집이라는 장소는 지나간 과거 속에서 친구, 가족, 선생님들을 끄집어내고 소록도 ‘문둥이’와 더 멀리는 일제 수탈에 대한 상상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518항쟁과 분단 조국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의 작업은 바로 이 기억의 나래 펴기를 사진으로 해 보는 것이다. 그저 평범한 사진으로 하는 것은 그래야 기억이라고 하는 이질적이면서 방향성도 없어서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을 올라타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주제로 삼아 본격적으로 한 작업이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g’(2010)다. ‘아리랑’은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고정남은 디아스포라였다. 디아스포라로서 그는 일상 속 평범한 곳곳에서 문득 문득 기억을 떠올리는 여러 오브제들을 만난다. 그 안에는 책도 있고, 부채도 있고, 셔츠도 있다. 모두 개인이 흘려보낸 어떤 시간들과 관련한 기억을 갖는 것들로 사진을 보는 이의 느낌과는 관련 없이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것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배치한다.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 특정 오브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말해주려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사적 영역에서 불현 듯 일어나는 감정이다. 보는 이와 공유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다. 그래서 작가에게 불친절을 제기하는 것은 독자의 횡포다. 그의 의식이 흘러가는 것을 누구도, 심지어는 그 자신도 규정할 수 없는데다가 지금의 기억과 의식의 흐름은 오랜 세월 속에서 침전되어 온 것들인데 그것을 어떻게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의 불편한 태도 덕분에 그 평범한 사진에서 그가 떠올리는 그의 기억이 아닌 내가 떠올리는 나의 기억을 만날 수도 있다. 사진의 지평이 확대된 것이다.

  1. 장소성, 식물성 그리고 의식의 흐름

고정남 사진은 장소성을 축으로 전개된다. 초기의 일본 동경 거리, 골목, 집, 적산가옥 등에서부터 이후의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 콘크리트 구조물, 진달래가 핀 대지, 산, 들판 등이 주요 장소다. 장소성이라 함은 어떤 ‘곳’이 그 안에 축적된 문화, 역사, 환경 등과 함께 만들어내는 성격이다. 그러한 ‘장소’를 자기 작품의 중심 개념으로 설정한 것은 장소가 기억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신이 고향 장흥에서부터 출발해 광주를 거쳐 일본에 이르고 다시 서울과 인천에서 살면서 아주 다양한 장소를 자신의 삶 속에서 옮기면서 가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택한 여러 장소 가운데 자신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것은 집이다. 그는 꼭 집 앞에 사람을 불러 세운다. 장소성을 중심에 두고 집과 사람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태도다. 또, 때에 따라서는 주위 배경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하는 전혀 뜬금없이 서 있는 적산가옥도 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불화하는 현대인의 심성을 보여주면서 기억을 상실해가는 맥락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Jindalrae#002_Lambda print_76.2×101.6Cm_2008 / Jindalrae#013_Lambda prin_76.2×101.6Cm_2007

 

진달래가 활짝 핀 곳에 사람을 불러와 세워 찍는다. 자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집이나 진달래 혹은 또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기억과 관계를 맺는 어떤 인물을 불러들여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 인물은 사진가가 갖는 기억을 매개해 주는 아는 사람이다. 형의 아들도 있고, 고향의 대학 후배도 있고, 그 후배의 동생, 그 후배 와이프의 친구의 딸, 아주머니 제자, 그 아주머니의 딸 등이다. 기억은 연기(緣起)와 같아 무엇 하나 독자적으로 홀로 설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맺어지지 않는 인(因)과 연(緣)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인물의 포즈나 의상 등은 모두 작가의 철저한 연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하나의 요소가 모두 철저한 기호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호는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의식의 궤도를 따라 마음껏 상상의 활보를 치고 다닌다. 진달래가 만개한 서울 북한산에서 웃통을 벗은 채 밀리터리룩의 하의를 착용한 조카를 모델로 찍은 사진이 있는데, 모델의 얼굴이 없다. 나는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렇게 읽었다. 남북 분단과 그 대치 상황에서 주체성을 잃은 이 시대의 한국인이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은 진달래가 고향의 기호이면서 북조선의 기호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옷을 벗은 채 낯을 숨기고 있다. ‘종북’과 ‘좌빨’이 넘치는 이 시대를 아무도 목 놓아 슬피 울지 않음에 부끄러워 낯을 가린 것일까? 사진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진의 해석은 이미 나 안의 영역에 들어와 버렸다. 이것이 고정남의 사진 세계다.

진달래는 고향 장흥의 뒷산에 지천으로 피던 꽃으로,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의 상징이 된다. 그리워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디아스포라.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존재,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느 곳에나 속하는 자신을 표상하는 의미체가 바로 진달래다. 동시에 이 시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가 연상하는 김소월 진달래의 처절한 슬픔,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가리키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리움이나 기억으로 연결되니 다시 집으로 연결되고, 그러다 보니 다시 그 때 그 시절 함께 살던 사람들과 연결된다. 묘한 이음새의 도돌이표다. 마찬가지로 그의 사진에서 진달래는 자연의 표상이기도 하다. 집으로 대표되는 구조물과 대치되는 자연이다. 그래서 그 자연성을 말하기 위해 인공성의 정점에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보여준다. 그 콘크리트 구조물은 타향 혹은 이국의 기호이자 고향 산천 자연의 대척점으로서의 대도시의 기호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은 자연이라는 평화와 갈등하는 전쟁의 기호이자 분단의 기호다. 그가 콘크리트 구조물의 소재를 통일로에서 취한 건 바로 이런 방식으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고향과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이르고, 다시 전쟁에 이르는 의식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이에 발생한 의식의 흐름에 대해 작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도 작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고정남이 식물성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이 갖는 고유의 속성인 간결과 여백을 따르는 방식으로 한다. 그가 즐겨 쓰는 미니멀 방식이다. 그는 멀리서 조망을 하여 경관을 그려내는 전체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평범한 세계의 일부를 통해 자연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의 자연을 찍은 사진 중에 전체를 크게 그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실 그것은 전체가 아니고 특정한 일부를 찍은 것이다. 여성의 젖꼭지 형상을 닮은 두 개의 산봉우리, 여성의 음부 같이 생긴 계곡, 폭포 등을 찍은 것이다. 모두 여성성을 배태한 식물성과 그것의 확장 개념인 자연성에서 찾은 것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은 이 모태로서의 여성성을 오브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여성의 성기를 닮은 복숭아 모양의 팥빵, 영화 ‘감각의 제국’ 비디오 테이프, 모니터로 잡힌 에로 섹스 장면 등이다. 이제 작가의 의식은 처음 고향의 진달래에서 출발하여 식물성과 자연을 거쳐 남녀합일과 섹스를 소비하는 문화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는, 경계를 모두 무너뜨리는, 물 흐르듯 가는 의식의 흐름이다.

Winter Vacation#03_Lambda print_71×86.5Cm_2003 / Winter Vacation#04_Lambda print_71×86.5Cm_2003

 

  1. 둘이 하나 되는 대동계

고정남의 최근 작업은 세계 존재의 원리 즉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를 말하는 방식에 꽂혀 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새로운 형식인 딥틱(diptich 二幅畵)이 바로 그 고민의 산물이다. 그 안에서 그의 사진은 이중 구조를 띤다. 이는 애초 식물성/자연성과 인공성에 대한 대조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장의 이미지로 분명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미지는 언어의 문법이 말이나 글과 달라 직접적이지 않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연작으로 하는 것이 더 좋다.

성모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장면은 기독교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장면이다.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어야 하면서 동시에 성스러움이 들어가야 한다. 로베르 캄팽의 수태고지의 장면을 담은 트립틱(triptich 三幅畵)에는 수태를 고지하는 천사와 마리아가 중앙에, 그리고 요셉이 우측에, 후원자 부부가 좌측에 그려져 있다. 이를 두고 달리 해석할 수도, 속 되게 볼 수도 없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 이 세 장면을 다 담을 수도 있지만, 각각의 패널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더 실감이 나고, 강하다. 경계를 나눈 뒤, 그것을 다시 하나로 묶어버림으로써 전체가 결국은 하나라는 메시지와 전체는 셋의 개별로 이루어졌고, 그 세 개의 각각에서 중심은 가운데에 있다, 라는 메시지를 주기에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틀이 셋이 아닌 둘이 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항상 그렇지만 셋과 둘은 그 의미가 전적으로 다르다. 셋과 달리 둘에는 중심성이 없어지고, 그것들은 서로 양립하게 된다. 셋은 안정적이지만, 둘은 불안하다. 셋은 순환적이지만 둘은 단선적이다. 그러면 그 둘을 어떤 것들로 배치할 것인가? 겉으로 보기에 전혀 다른 둘을 배치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껏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양식이다. 반면, 얼른 보아 쉽게 연결이 되는 둘을 보여주면, 서로의 관계를 더욱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양식이다. 전자가 선문답 같다면, 후자는 동요 같다고나 할까? 고정남은 이 두 가지 표현 방식을 다 사용한다. 둘은 다른 듯, 같아서 그 안에 세상에 대한 조롱과 위트가 담겨져 있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터치함으로써 세상을 희롱하는 놀이다.

                         바람의 봄#17-1_Archival Pigment Print_57.5×77.5Cm_2014 / 바람의 봄#17-2_Archival Pigment Print_57.5×77.5Cm_2013

 

사진가 고정남의 딥틱은 일본의 하이쿠의 영향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하는 하이쿠는 계절을 축으로 하여 세상을 놀이하는 문학 장르다. 하이쿠와 고정남의 사진은 자연에서 만난다. 고정남의 자연을 담은 사진이 그것을 차용하기 좋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상의 흐름에서 만난다. 논리적인 구조 대신에 농도가 짙은 의식의 흐름으로 하는 하이쿠가 고정남의 기억과 의식의 흐름의 사진에서 차용하기에 좋게 하였다. 그리고 평범한 대상들을 가지고 해학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하이쿠의 세계가 고정남의 열린 해석의 사진 세계와 잘 어울려 차용하기에 좋게 하였다. 이제 그가 보여주는 딥틱을 보면서 독자는 독자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기만 하면 된다. 답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가치와 의미로 된 규정도 없고, 모두가 있는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나 자신만의 세상을 누려보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누는 이의 것이기도 하다. 사진 예술이 사진가 고정남을 통해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