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10.10 조강석 작가의 『돌의 정원』(사진집)에서 고광민(서민생활사 연구자)     어떠한 역경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그냥 있는 돌에 관하여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 제주도의 돌은 여러 가지 관심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런 돌의 모양, 외모도 신비롭다.   윗글은 조강석 사진집 『돌의 정원』 ‘작가 노트’의 한 토막이다. 조강석 사진작가는 제주도 돌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었다. 조강석 사진작가의 『돌의 정원』을 걸으며,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민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름의 돌광 지세어멍은 / 둥글당도 살을매가 난다”고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돌이나 바위로 구성된 석산(石山)을 ‘산’이라고 하였고, ‘송이’와 흙으로 구성된 토산(土山)을 ‘오름’이라고 하였다. 송이는 측화산(側火山)이 폭발할 때 검붉은 빛깔의 자잘한 돌자갈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오름을 방목지로 활용하는 수가 많았다. 오름에는 어쩌다 하나씩 뒹구는 돌도 있었다. 이것이 ‘오름의 돌’이다. ‘지세어멍’은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가정을 이루지 못하여 혼자 사는 여자라는 말이다. 제주도 오름의 돌은 소나 목동의 발에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었고, ‘지세어멍’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천대받기 마련이었다. 그러다가도 언젠가는 ‘살을매’, 곧 사는 맛이 난다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은 오름의 돌을 주워다가 돌담으로 쌓게 되고, ‘지세어멍’도 마음 든든한 남자를 만나 살림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반전(反轉)이고 역전(逆轉)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노랫말처럼 오랫동안 돌을 삶의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의 돌 이용의 역사는 매우 오랬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돌로 만든 작은 굄돌 위에 두꺼운 덮개돌을 올려놓은 남방식 고인돌이 제법 전승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현대식 등대와 구별하여 주로 재래식 옛 등대를 ‘도대’라고 하였다. 제주도에는 옛 등대가 많다. 제주도 옛 등대는 제주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 까닭은 제주도가 화산섬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조 숙종 28년(1702) 음력 6월에 제주도 목사(牧使)로 왔던 이형상(1653〜1733)은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제주 섬은 사방으로 칼날 같은 돌멩이가 빽빽하게 서 있어서 조수간만에 구애받지 않고 배를 붙일 곳은 없다(四圍劍石束立 逋邊無可泊舟)”고 하였다. 제주 섬 바다에는 칼날 같은 돌이 빽빽하게 서 있었으니, 밤에 고기를 낚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포구로 돌아오는 바닷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험난한 바닷길에 불을 밝혀 조심조심 포구로 배를 들여 매려고 옛 등대를 세웠다. 제주도 옛 등대는 칼날 같은 돌멩이가 깔린 험난한 바닷길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제주도는 한라산이 우뚝 섰고 그 경사가 완만하게 내려와 바다에 이른다. 제주도 마을들의 뒤쪽은 한라산이고 앞쪽은 바다이다. 마을 앞 빈틈이 있는 곳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이래서 제주도의 마을들에는 방사 기능의 구조물이 흔하다. 그 이름도 제각각이지만 보통 방사탑(防邪塔)이라고 하였다. 방사탑은 둥글고 넓게 굽 자리에 돌을 쌓고 차차 올라갈수록 둘레가 좁게 돌을 쌓아 올려 맨 위에 뾰족한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지형이 허하거나 사기(邪氣)가 비추는 쪽으로 돌부리가 향하게 새워 놓았다. 동복리(구좌읍) 사람들은 소의 질병을 막으려고, 조일리(우도) 사람들은 전염병을 막으려고, 시흥리(성산읍) 사람들은 불로 인한 재난을 막으려고 방사탑을 세웠다. 제주도 사람들은 무덤 앞에 동자석(童子石)이나 인석(人石)을 세우는 수가 많았다. 동자석은 귀밑머리를 하고 있고, 인석은 귀밑머리를 풀고 땋아 올리고 머리에 탕건(宕巾)을 쓰거나 벙거지를 썼다. 동자석은 무덤 주인공의 심부름꾼이라면, 인석은 사악(邪惡)한 기운을 막아주는 수문장이다. 동자석은 무덤 앞에만 서 있었다면, 인석은 무덤과 고을의 성문 앞 그리고 방사탑 위에 서 있었다. 옛 제주목(濟州牧)과 정의현(㫌義縣) 지역에 있는 인석은 머리에 탕건, 그리고 대정현(大靜縣)에 있는 인석은 벙거지를 쓰고 있는 수가 많았다. 제주도의 석상은 수난을 겪어왔다. 무덤 앞에 세워진 동자석과 인석은 코가 잘려 나간 것이 많다. 제주도 무덤 앞에 있는 석상의 코를 누가, 왜 망가뜨렸을까. 동자석과 인석의 코에는 속신(俗信)이 붙어 있었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밴 여자는 끌과 망치를 들고 혼자 무덤으로 갔다. 끌을 석상의 코에 대고 망치로 때렸다. 끌과 망치가 부닥뜨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며 석상의 코가 떨어져 나갔다. 그 코를 가지고 와서 솥에 놓고 달여 먹었다. 인공 유산의 수단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마소를 풀어놓고 가꾸었다. 방목지와 비방목지(非放牧地)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구별의 수단은 돌담이었다. 제주도의 돌담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집의 울타리를 에두른 돌담을 ‘집담’, 무덤의 주위를 에두른 돌담을 ‘산담’, 그리고 밭 주위를 에두른 돌담을 ‘밧담’이라고 한다. 집, 무덤, 밭은 마소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돌로 만들었다. 돌로 파서 만든 ‘돌화리’라는 화로, 소줏고리 대신 돌로 만들어진 술 빚는 ‘소줏돌’, 관솔로 어두운 곳에 불을 밝혀 놓아둘 수 있게 만든 ‘등경돌’, 돼지 먹이를 주던 넓적한 돌판 가운데 홈을 파서 만든 ‘돗도고리’ 등등 말이다. 그래도 다듬잇돌만큼은 제주도 돌로 만들 수 없었다. 제주도 돌은 구멍이 숭숭하였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돌은 ‘시시포스 바위’이면서 생명을 지탱해주는 ‘복 바위’였다. 사진작가 조강석은 제주도 사람들이 창조한 돌 유산의 흔적들을 수준 높은 예술적 안목으로 카메라에 담아 사진집 『돌의 정원』을 묶어냈다. 사진작가 조강석의 제주도 돌 유산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과 노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또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