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論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광수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최영진은 20년 가량 작업한 것들을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전시와 책으로 내고 있다. 처음 세 딸과 부인을 소재로 한 〈네 여자〉를 필두로 갯벌, 밤, 새만금, 서해안, 대공(大空) 등을 소재로 하여 생태와 자연을 말하는 작업을 해왔고, 지금은 서해안, 섬, 새만금을 동시에 작업하면서 산에 대한 작업도 같이 하고 있다. 섬과 바다, 간척지와 땅, 산과 도시 그리고 문명이 엮는 장대한 서사시를 때로는 바다의 시선으로 때로는 땅의 시선으로 때로는 산의 시선으로 보는 작업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도시와 문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다를 보고, 산을 보아 왔다. 그 때 산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문명에 의해 대상화 된 존재다. 최영진의 사진은 그런 이분법적, 분별적, 문명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다. 도시에서 산을 바라보지 않고, 산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될까?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일까? 바다가 인간 욕망의 배출구로 소비되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산이 문명을 낳고, 바다가 문명을 낳는 모태인데, 그 모태를 소비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해 사유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지는 작업이다. 네 여자(1997~2000) 최영진은 전라도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겐 서해안 갯벌과 바다가 추억의 공간이자, 돌아가고 싶은 귀소(歸巢)다. 지금의 작가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바다 곁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와 갯벌은 곧 자연이다. 달리 설명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자연을 자연의 시각으로 담으니, 그의 작업은 결국 자연에 대한 헌시가 된다. 바다가 산보다 위대한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노자의 생각을 사진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굳이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유한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인위적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예술의 방편을 따를 이유도 없다. 노자의 자연을 사진으로 말하려면 쉬운 사진이 좋다. 그래야 여러 쪽에서 울림이 생긴다. 결정적 순간이라든가, 기존 프레임의 파괴, 예리한 운동성 같은 특별한 (혹은 창조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세밀하게. 1.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도덕경》56장) 사진가 최영진이 자연과 생태의 삶을 주제로 삼아 하는 작업 가운데 말하기 방식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서해안〉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에 전시하고 《West Sea of Korea》라는 이름으로 낸 책이다. 이 책은 멀리서 본 어느 서해안의 해수욕장 사진 몇 컷으로 시작한다. 아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한 동안 계속해서 나온다. 주로 하늘 여백이 넓고 빛이 은은하고 사람들이 아주 작게 나오는 이미지들인데, 흔한 키치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흔한 동양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서양의 추상화적 풍경화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재주의 사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책의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소용돌이가 한 번 인다. 시커먼 하늘 밑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가 나오는데, 누가 봐도 어? 이게 뭐지? 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노자가 말하는 현공(玄空)일까? 그리고 곧 이어져 느닷없이 죽은 철새 한 마리 대가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섬뜩하다 못해 소름 끼친다. 그리고서는 또 죽은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가 나오면서 책이 끝난다. 끝 부분의 사진 몇 컷 때문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서해안 새만금(2004~2008)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쉽게 간파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이런 작업의 경우, 책이나 전시장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 각 파트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에 주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의 경우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끝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하지만, 난 첫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한다. 첫 부분의 해수욕장 풍경 사진들은 평화스럽고 아늑한 느낌이다. 반면에 끝 부분의 사진들은 죽어서 썩어가는 새와 물고기라 심란하다. 첫 부분 사진들만으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읽을 수가 없는 반면, 끝 부분의 사진들은 그것만으로도 작가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첫 부분 사진들은 독자를 고의로 안심시키는 일종의 기만전술로까지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책 첫 부분의 사진들은 이발소에 걸어놓으면 딱 이발소 사진이고, 응접실에 걸어놓으면 딱 살롱사진이다. 그렇지만 죽은 새와 물고기 사진들과 함께 보면 작가주의에 충실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 하나 하나는 애호가에 의해 구입되어 단독의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묵시록의 메시지는 소거되어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감상 미학이 발생한다. 전적으로 독자가 주체가 되어 사진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2.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닮는다. (《도덕경》25장) 고대 힌두 현인들은 땅을 품이 넓은 자라 했다. 그리고 그 품이 넓은 자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어머니를 암소로 보았다. 그들에게 땅은 만물에 생(生)을 주고 기(氣)를 주는 암소였다. 그런데 그 대지의 어머니 신 쁘리트위Prithvi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 주는데, 인간은 그를 착취한다. 땅은 모든 식물을 낳게 하는 어머니다. 끝없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는 생명의 모태다. 곡식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낳게 하고, 죽으면 그것을 품어 다시 또 다른 생명으로 올려주는 너른 터다.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고, 그것이 윤회하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 땅, 어머니 대지가 곧 사진가 최영진의 갯벌, 라 마르(La mar)다. 라 마르,살아있는 갯벌(2000~2003) 최영진의《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갯벌을 클로즈-업으로 찍은 이미지들밖에 없다. 장면이 다양하지 않으니, 내러티브가 있을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동어반복으로 느낌이 매우 (혹은 너무) 강렬하다. 지루할 정도로 단순하면서 어찌 보면 일종의 패턴으로까지 보이는 이미지들의 연속이다. 그러다보니 사라져가는 갯벌을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사회문화적 맥락은 온전히 소거되어 버린 작업, 그렇다고 갯벌의 객관적 다큐멘트로도 쓸 수 없는 이미지들. 왜? 난, 어머니의 속성에 대한 생각에서 작가 의도의 실마리를 찾았다. 어머니란 자애롭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표독하기도 하다. 그 둘, 자애로움과 표독함은 편의상 따로 떨어뜨려 생각을 할 수는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다. 그 일원론적 세계 안에서 어머니란 존재는 오로지 자궁일 뿐이다. 나는 최영진의 갯벌을 어머니의 그 자궁으로 읽었다. 자궁 하나만으로 모든 이미지를 다 포섭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맥락이나 단초들을 보여줄 필요가 없을 것으로 읽었다. 보여주기만 하면 될 뿐, 굳이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사진은 노자를 무척이나 닮았다.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하늘을 닮고, 하늘은 도를 닮고, 도는 자연을 닮았다는 노자의 말을 최영진은 이렇게 형상화 했다.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사진들은 모두 현미경적이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살갗 느낌이다. 어떤 것은 살갗이 튼 자국 같기도 하고, 모세혈관 같기도 하고, 모공 같기도 하다. 숨을 쉬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낸다. 사방이 꽉 막힌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생명을 잉태한 태초의 땅을 느끼고, 위로 열린 하늘 공간으로 나뉜 프레임으로는 코스모스로 가기 전 카오스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갯벌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어디론가 가는 운동을 보여주는 듯, 힘이 넘쳐흐른다. 프레임이 막혀 있든, 열려 있든《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사진들은 꿈틀거리면서, 갯벌 위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없어도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얼마나 작은지 우리의 눈과 인식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작은 존재들이 이루는 전체를 인식할 수는 있다. 어머니의 손길 하나만으로도 어머니의 우주적 사랑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분은 보되,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전체를 보되 부분을 보지 않는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갯벌을 파괴하는 것이란 곧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뭇 생명체를 죽이고 나아가 대지의 순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인(因)과 과(果)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고, 모든 존재는 그 안에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법칙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현대 분명이 지금같이 자연을 대상화 하고, 약탈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만 몰두하고 탐닉에 빠진다면 결국 그만큼 자연은 그 명(命)을 재촉하게 된다. 철저한 되갚음, 응보(應報)의 세계다. 그 자연의 보복을 경외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진가 최영진은 지금. 3.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어서다. (《도덕경》2장) 최영진은 분노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처리해버린 새만금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분노를 열정으로 쏟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격문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직설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로 넌지시 말한다. 고인돌을 찍은《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는 그러한 그의 사진 언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고인돌 위에 끼어 있는 이끼, 돌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틈이 만들어내는 구멍,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 그것들이 빛과 더불어 무시로 그려내는 파노라마 같은 그림, 소나무 밭을 주위에 두고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을 초록으로 만들어버린 오브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