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오개-김준호 2017.2.17.~2.26     존재의 증명, 부재의 증명 애오개 사진 곽윤섭 R.B는 최후의 저서 ‘밝은 방’을 통해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사진에 대해 총정리를 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란 느낌이 몇 군데 문장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1부와 2부를 합해 모두 48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마지막 2개의 장의 제목이 각각 47장 ‘광기, 연민’과 48장 ‘길들여진 사진’이다. 1889년에 니체가 매를 맞는 말을 목격하고 연민에 넘쳐 울면서 말의 목을 끌어안았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 47장이며 “미칠 것인가 아니면 순응할 것인가. 사진은 두 개의 선택지를 가졌다. 그 선택은 나의 것이다. 문명으로 코드화된 완벽한 환상의 대광경을 붙들 것인가 아니면 아주 다루기 힘든 현실의 깨어남과 맞설 것인가”로 끝나는 것이 48장의 끝이자 ‘밝은 방’의 끝이며 롤랑 바르트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문장이다. R.B는 ‘밝은 방’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진의 노에마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거기 있었음(That-has-been)’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란 말이다. R.B는 또한 사진은 부재의 증명이기 때문에 사진은 죽음이며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풀었다. 사진이 왜 부재의 증명인가? 인물사진을 예로 들면 쉽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그림과 달리) 실제의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을 운명을 안고 있다. 따라서 사진에 찍힌 사람은 이미 죽었거나 언젠가 죽을 것이다. 인물사진이 아니라면 왜 부재의 증명인가? 사진에 찍힌 대상은 셔터가 눌러진 그 순간의 짧은 빛만 받아들인다. 1822년에 니엡스가 찍은 최초의 사진엔 테이블 위에 유리컵과 숟가락 등이 보인다. 실제의 유리컵과 숟가락과 달리 사진에 들어있는 유리컵과 숟가락은 1822년 어느 날 니엡스가 빛을 받아들였던 그 순간의 유리컵과 숟가락이다. 만약 테이블이 아직 있고 유리컵이 아직 있다면 그것은 니엡스 사진 속의 유리컵이나 숟가락과는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기 때문에 부재의 증명이다. 김준호의 ‘애오개’는 그래서 존재의 증명이자 부재의 증명이 되는 것이다. 기와지붕, 골목의 보도블록, 가로등, 어느 집 담장 앞에 줄지어 서있는 화분, 전기 계량기, 창문 밖에 달려있는 에어컨 실외기는 모두 애오개의 게딱지 같은 집을 형성한다. 지금 애오개엔 김준호의 사진에 찍힌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재개발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운명이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다만 사진 속에 남아 그것이 존재했음을 전해준다. 또 동시에 이 사진 속에 찍힌 그 순간의 파편 같은 빛과 그림자는 김준호의 카메라와 삼각대가 물러서고 난 다음의 빛과 그림자와 다르기 때문에 부재의 증명이다. 김준호의 사진엔 좀처럼 사람이 없다. 그는 “굳이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고 일부러 없는 순간에 찍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하다. 김준호의 애오개 사진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진에 사람(의 흔적)이 있다. 저 보도블럭을 깐 사람이 있었으니, 저 기와를 올린 사람이 있었느니, 저 거칠게 마감한 시멘트벽을 쌓아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저 집과 골목과 동네를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슬라브 옥상 위의 장독대, 남루하지만 깔끔한 와이셔츠를 건 사람이, 화분에 국화를 심은 사람이, 겨울이면 골목의 눈을 치운 사람이, 김준호가 사진을 찍는 광경을 본 동네 사람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존재한다. 김준호의 ‘애오개’의 완성은 김준호가 했다. 긴 시간,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뀔 동안 김준호는 골목에 버티고 서있으면서 골목에 흔적을 남겼다. 골목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사진 ‘애오개’에 찍혀있는 최후의 흔적은 김준호의 발자국이다. 김준호가 애오개를 찍은 바로 그 다음날 재개발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준호가 골목을 뜬 다음에 누군가는 또 골목을 쏘다녔겠지만 그 흔적은 사진에 남아있지 않다. 김준호의 애오개는 존재의 증명이고 부재의 증명이다.               작가 노트 도시는 숙명적으로 년대기 적 시간으로 생성되고 관리 상태에 따라 느림과 더딤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쇠퇴하게 된다. 쇠퇴하였지만 주민들이 생활하는 주거지를 인위적 파괴를 가하여 아파트를 건축하는 행위는 자본가들의 이윤추구의 전형이며 가진 자의 횡포에 다름 아닌 이유가, 그곳에 깃들어 살던 그이들은 현재의 생활환경에서 보다 더 먼 곳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냉혹함과 함께 동 시대 역사를 같이 기록하며 살아가지만, 결코 融合못하는 변방의 이질계층으로 보는 우리의 민낯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추악하게 그곳 주민들 삶과 환경을 파괴하여 고층건물로 대체 해 나갈 때, 화려한 외관으로 포장된 건축물 뒤에는 같은 시간 공존하면서도 유령처럼 떠돌며 살아야하는 그 숫자조차 헤아리기 힘든 우리의 이웃들은 연속 재생산되고 다시 유랑의 길을 떠 나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우리들의 숙고는 아직도 준비되지 못한듯하다. “ 그가 앞으로 나아 갈수록, 그의 걸음 거리는 느려진다. 저 느림 안에서 나는 행복의 어떤 徵表를 알아보는 듯하다. - 밀란 쿤데라의 느림 중에서- 어쩌면 현대인들은 쿤데라의 말처럼 ‘느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이 엄청나게 변화하는 빠른 속도에 뒤처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시대, 오히려 그 공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해서 현재의 어려운 환경에서 더 나락으로 떠밀려지는 그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빠른 속도에 취해 속도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反省의 자아는 상실되고 오직 목표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가속도로 상승하기만 한다. 이것을 현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를 호흡하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수수방관하거나 외면하며 남의 일로 볼 일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다. ‘애오개’ 사진들은 겉보기와 들여다보기의 일환이다. 지금은 사라진 골목과 벽들 퇴락한 주거시설 그리고 이곳에서 살던 이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와 소파, 끊임없이 금가고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 덧발라지는 벽의 시멘트 바름 질에서, 좁은 골목에서 어깨 부딪히며 살아가는 그이들의 호흡과 손길, 삶의 날들이 오롯이 현재증명으로 보여 진다. 소위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不均等하게, 주어진 소득으로 인하여 낙오되는 대열처럼 뒤떨어져 열악한 환경에 주어진 그이들 삶을 드려다 보는 행위에서는, 사진 적 醜와 美라는 개념 못지않게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하는 사진의 본질적 요소로 먼저 접근하게 되었다. 사진은 결국 기록이고 작가가 보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 재해석이기 때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