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남 論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 정해진 것은 없다.    이광수(사진비평가/부산외국어대 교수)   고정남 사진 세계는 손에서 떨어져 나온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 같다. 어디로 갈지 좀체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바람 빠져가는 풍선도 일정한 궤적은 있다. 그 궤적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정남은 90년대 초 학생 운동이 정점을 찍으면서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져 갈 준비를 하던 시절 전남대에서 미술을 했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자리에서 꽃을 피우던 그 희한한 시절에 그의 미술은 기존 질서 거부와 뜨거운 조국이 섞이면서 그 씨가 잉태하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사진 세계는 바로 이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 세계관이 섞이면서 나온 것이다. 고정남이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 98년 일본 유학에서부터이니 얼추 20년이 다 되어간다. 50이 넘은 나이지만 사진 나이로는 청년 중의 청년이다. 그의 주제, 소재, 방식이 어떤 틀로 짜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피 끓는 청춘이다. 일본에 유학 가서 처음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그 집은 고향 장흥에서 보았던, 그렇지만 전혀 눈 여겨 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냥 그저 그런 옛 추억의 적산가옥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느닷없이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어린 시절 부리나케 들락거렸던 친구네 집 2층집 관흥여관이 떠오른다. 일제 시대 때 부산과 여수를 잇는 물길의 요충지였던 탓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 동네 이곳저곳에 있었다. 그것이 갖는 역사성의 의미는 모르겠고, 그저 어릴 적 추억을 머금은 중요한 오브제가 고향을 떠나온 그 자리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고정남 사진의 궤적인 ‘장소와 관계성’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유정(有情)이라고 했던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빈 공간에 미움, 괴로움, 사람, 욕심, 집착과 같은 업(業)의 힘들이 마구 섞이면서 어떤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것 말이다. 떠나옴, 그리움, 그저 그러함, 불안감, 새로움이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은 일본 땅에서 물 흐르듯 섞이면서 그의 사진 세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집.동경이야기#06_Gelatin Silver Print_42x51.5Cm_2001/집.동경이야기#04_Gelatin Silver Print_42x51.5Cm_2001   일본에서 한 초기 작업인 ‘집. 동경 이야기’(2002)는 고정남이 지금까지 유지해오는 자신만의 작품 구성의 요체를 다 머금고 있다. 그 때 만들어진 고정남 사진 세계의 뼈대 위에 살이 붙어 오늘에 이른다. 그의 사진을 이루는 형상은 솥과 같다. 무슨 재료를 넣든지 다 끓여 뭔가 다른 음식을 낼 수 있는 솥 말이다. 그런데 그 솥의 발이 셋이 아니고 넷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첫 번 째 솥의 발은 평범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시선이다. 대도시 동경을 스치듯 지나면서 취한 장면들은 하나같이 전혀 뛰어나지 않는 그저 그런 보통의 이미지다. 관조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가 주체적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는 듯 한 시선이다. 분명히, 주관적인 시선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들로 쌓여 있는 백화점을 아이쇼핑 하듯 지나갈 뿐인데, 순간, 순간 어떤 촉이 발동하여 필을 받는다. 두 번 째 솥발은 장소성이다. 그 장소성은 ‘집’과 ‘콘크리트’로 표상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식물성으로 확장되고 그것은 다시 자연성과 여성성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 그의 장소성은 항상 누군가 그 의미를 매개해주는 사람과 연결된다. 장소가 관계성으로 이어지고 기억과 만나면서 사진가는 표현 방식에서 새롭고 의미 있는 발걸음을 하나 대딛는다. 세 번째의 솥발은 기억의 변주다. 집이나 거리와 같은 평범한 대상, 그리고 그 안에 놓이는 사람, 오브제, 식물성 등은 모두 기억을 매개로 하여 연결된다. 그런데 그 연계가 일정한 내러티브를 만들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저 평범한 하나, 하나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처럼 불륜이나 위선 등과 같은 일정한 주제 의식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그 평범한 것들을 자신만의 기억의 흐름에 따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쉬 따라가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기억이라는 것이 불안하고, 정형화 되지 못하며, 그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솥의 발은 대동 세상이다. 평범한 대상을 통해 장소 속으로 들어가 기억의 나래를 펴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대동 세상이다. 세상은 둘로 나뉘되 그 둘은 결국 둘이 아니고 하나다. 안과 밖, 자연과 인공,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모두가 다 하나로 모인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다. 고정남은 그 정리할 수 없는 불순한 세계를 사진으로 말하려 한다. 발이 넷 달린 솥은 불안하다. 지금 중간 단계에 와서 본 고정남의 사진 세계에 또 하나의 발이 나오려 꿈틀거린다. 무슨 발이 나올지, 앞으로 발은 몇 개나 더 나올지 궁금하다. 그의 물과 같이 흐르는 그 어떤 것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 없고, 낳지 못할 것이 없는 사진 세계의 무궁무진함이 가히 불교가 말하는 유정의 세계와 같다.                                          Super Normal#05_Lambda print_60×60Cm_2009/Super Normal#10_Lambda print_60×60Cm_2004   평범한 것들의 세계   고정남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성이다. 대상도 평범하고 그것을 재현한 이미지도 그저 그런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할 때 그래픽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그 분야에서 몇 년간 일을 한 데서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을 전공하면서 모더니티가 갖는 가치 평가를 둘러싸고 형성된 객관성에 대해 반발하였고, 자기 자신이 보는 세상, 자기 자신이 그리는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이 갖는 세상과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강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릇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로 분명하고 진리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은, 무릇 모든 존재란 그것이 속한 배경에 따라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그것에 대해 매기는 가치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자리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 눈앞에 펼쳐진 대상이 그 어느 때든 관계없이, 그 누구든 관계없이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들이 잘 알고, 그것이 갖는 어떤 분명한 의미를 국외자인 사진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여 그 의미와 달리 이해하고 느꼈다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동네 골목에서 만난 스모 선수는 일본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으나, 국외자인 사진가에게는 호기심이나 경외감 같은 것을 주는 존재이다.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임시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갖는 가치란 대체 무엇인가? 고정남 사진의 평범성은 그가 하는 기억 작업에 매우 유효한 매체로 작동한다. 사진은 그 이미지가 강력할수록 그 사진 기록이 갖는 사건의 장소, 대상의 정체성, 시간 등에 구체성은 약화되고 상징성만 강력해진다. 상징성이 확대됨으로써 그 이미지는 사건의 표피를 남기고, 그 이면에 담긴 복합적 관계는 무시되기 쉽상이다. 결국 사진으로 하는 기억은 그 이미지의 보편성으로 인해 복합 관계를 단순화하여 그 근원적 인과 관계를 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건에 대한 시각적 증거가 되면서 역사를 신화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약간의 심한 일반화이겠지만, 그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은 집합 기억의 표상으로 구성된 기념물, 전시물 등과 다를 바 없게 될 수 있다. 결국 비범한 대상과 사진 이미지는 사건을 신화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나’ 자신만의 이질적이고 액체적인 기억의 관계를 맺기 어렵게 된다. 그렇지만 평범성을 보여주는 소재는 일목요연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서 대상들과 관계 맺기가 무궁무진하다.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 만들기이다. 세계를 평범한 것들이 모인 것이라 본다면 그의 사진 또한 평범한 것을 대상으로 삼고 평범하게 재현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극적이고, 강하게 어필하고, 빛을 이용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 세계는 그런 강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체계적인 것도 아니요, 논리적인 것도 아닌데, 왜들 다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려 안달인가? 당신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 고정남 사진 세계를 이해하러 가는 출발선에 서는 거다.                                                Song of Arirang#01_Lambda print_101.6×76.2Cm_2010 / Song of Arirang#06_Lambda print_101.6×76.2Cm_2010   기억의 변주와 관계 맺기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매체다. 오랫동안 기억은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 문자에 의한 기록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원인과 과정을 단순화 시키거나 없애버릴 수밖에 없다. 얀 아스만(J. Assmann)은 기억이 문화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기억은 문자, 회화, 영상, 건축물, 제의, 기념비, 박물관 등을 통해서 유지된다고 했다. 기억은 철저하게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이 기억을 위한 매체로 쓰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사진가들이 기억을 주제로 작업을 많이 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 그 자체가 항상 지나간 시간을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항상 무엇이든지 간에 대상을 놓고 찍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상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기억은 ‘공간적 기술’이 된다. 우리는 기억을 떠올릴 때 일정한 구조를 갖는 ‘장소들’을 기준으로 떠올린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학교 갈 때 자전거를 태워준 그 길, 친구들과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갈 때 탔던 그 엄청난 크기의 배, 첫사랑 그녀와 등산을 하다 길을 잃고 산중 노숙을 하던 그 산비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