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0.~2.29       사진으로 하는 착시놀이가 괴롭지 않은 이유   이영준(계원예술대) 사진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사진은 절대로 크로핑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꼰대들이 많이 하는 말이다. 6×6, 6×4.5, 6×7, 4×5, 8×10 등 사진기 회사의 취향과 방침에 따라 수많은 사진의 포맷들이 있는데 찍는 사람은 마음대로 프레임을 바꾸면 안 되나? 아폴로11호가 달에 가져간 핫셀블라드 카메라는 NASA가 특별히 주문해서 기존의 60mm 폭을 70mm로 늘린 필름을 썼는데 일반인은 그런 주문을 하면 안 되나? 디지털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다양한 포맷들이 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그간 사진을 묶어두고 있던 암울하고 경직된 근본주의적인 분위기는 홍석표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사진 속의 이미지들을 마음대로 배치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이미지놀이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이미지놀이를 다른 말로 하면 착시놀이라 할 수 있다. 사람 눈이 정확한 거 같지만 착시현상도 많고 주관적인 해석에 휘둘리고 해서 대단히 부정확하다. 과학기술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확성은 오류지만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만의 보는 방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람은 본디 놀 줄 아는 존재라 했던가. 유희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루덴스는 장난감 같은 물체를 가지고 노는 것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시선의 놀이도 포괄하는 것이다. 정확성과 진실이란 관점에서 보면 착시는 오류지만 유희의 관점에서 보면 놀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홍석표의 사진에서는 실제의 바다와 거짓의 바다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착시 현상 때문에 어느게 실제고 어느게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다. 홍석표의 사진에는 전세계의 여기저기 장소들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보면서 의례 말한다. 자유의 상이 나오니까 뉴욕, 퐁피두 센터가 나오니까 파리, 피라밋이 나오니까 이집트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가. 이 세상에는 이집트의 진짜 피라밋도 있지만 수많은 이미지로 복제되어 퍼진 가짜 피라밋도 있다. 어느 것도 더 진짜라고 말하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따라서 ‘사진은 반드시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고 달려들면 괴로운 노릇이지만 사진을 가지고 얼마든지 즐겁게 놀 수 있다고 접근하면 전경과 후경이 뒤섞이고 실제와 거짓이 뒤섞이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자동차의 뒷거울을 보면 어느게 먼 것이고 어느게 가까운 것인지 헛갈릴 때가 가끔 있는데 운전에서는 위험하지만 사진에서 그런 헛갈림은 착시의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가지고 착시놀이를 하게 되면 ‘사진이 진실의 전달자’라는 굴레도 벗어버리기 때문에 사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의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 놀이를 하는데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음식을 가지고 놀던 언어를 가지고 놀던 장르구분이 무의미 하듯이 말이다. 사진이 착시놀이가 되면 원근감이 뒤섞이고 물체의 사실성도 뒤섞여서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우리가 가깝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멀 수도 있고, 멀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가까울 수도 있다. 거리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면 사진이 벽에 걸린 평면 이미지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건축이 될 수도 있고 환각이 될 수도 있으며 도시가 될 수도 있고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무한변신의 가능성이 있는 사진을 오로지 진실의 전달수단으로만 묶어놓기에는 아깝다. 사실 사진과 착시는 서로 반대 되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의 정확성 덕분에 각종 산업과 과학, 행정, 전쟁 등 온갖 일들이 이루어졌다. 그것들은 착시를 배제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갤러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갤러리나 개인의 작업공간은 사진의 규칙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현실의 영역에서 가능하지 않던 것들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공간이다. 홍석표의 착시사진은 바로 그 공간에서 작동한다. 어떤 이는 착시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홍석표는 반대로 착시에서 새로운 세계를 본다. 홍석표는 그렇게 해서 사진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간다. --------------------- 홍석표는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박사)을 졸업했다.       ...